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덴마크-노르웨이 왕국 (문단 편집) ==== 종교 개혁 ==== 백작 전쟁의 승리로 이제 크리스티안 3세의 지위는 공고해졌다. 다만 백작 전쟁을 치르면서 크리스티안 3세가 자신의 영지인 홀슈타인을 비롯하여 독일 귀족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치세 초기에는 한동안 그들에게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크리스티안 3세의 초기 6년 동안 덴마크의 국가평의회와 독일 출신 자문관 사이의 알력이 계속해서 발생하였다. 그리고 비록 덴마크 귀족들이 고위직을 덴마크 출신으로만 채워야 한다는 칙령을 받아내면서 대립이 일단락되는 듯이 보였지만 독일인 자문관들은 여전히 크리스티안 3세를 통해서 한동안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후 크리스티안 3세는 자신의 즉위를 반대했던 가톨릭 세력을 숙청하기 시작했다. 이는 단순히 덴마크의 국교를 루터교로 변경하는 종교적인 문제가 아니라 가톨릭 주교들의 특권을 축소하여 백작 전쟁으로 부족해진 재정을 메우려는 경제적인 이유도 있었다. 크리스티안 3세는 AD 1536년 8월 자신에게 반대하였던 주교 3명을 체포하였고 교회 영지를 몰수하여 백작 전쟁으로 인해 생긴 부채의 일부를 갚았다. 이에 따라 몰수된 영지 대부분이 독일의 프로테스탄트의 소유가 되었다. 나아가 크리스티안 3세는 루터교를 덴마크의 국교로 삼기 위해서 자신이 재결성한 코펜하겐 국가평의회를 통해서 AD 1536년 10월 30일 루터교를 국교로 승인했다. 이제 크리스티안 3세는 덴마크의 [[가톨릭]] [[수도원]]들을 폐쇄하고 가톨릭교회의 재산을 몰수하여 자신의 측근에게 분배하였다. 또한 가톨릭 성당과 신학교가 문을 닫도록 했고, [[종교개혁]]을 거부한 [[사제]]들은 추방하였다. [[주교]]들도 감옥에 갇힌 채 [[독신]] 생활과 특권을 포기하도록 종용받았는데, 일부는 이를 수용하고 석방되었으나 나머지는 [[순교]]를 선택하였다. 이와 별도로 크리스티안 3세는 종교개혁을 위해서 이미 [[독일]]의 포메리아나 공작령에서 종교개혁을 이끈바 있었던 요한 부겐하겐의 도움을 받아 덴마크의 교회를 [[루터교]]로 재조직하였다. 예배 의식과 기도문을 루터교식으로 변경하였고 AD 1537년 코펜하겐 대학교를 루터교 대학교로 재편했으며, [[성경]]의 [[덴마크어]] 번역 작업을 시작하여 AD 1550년 최초의 덴마크어 성경인 '크리스티안 3세 성경(Christian III Bible)'을 출간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